본문 바로가기
문학/유명 시인의 시

비 오는 간이역에서 밤열차를 탔다 5 /이정하

by 이태일, 태라라 2011. 4. 14.
      
      
       비 오는 간이역에서 밤열차를 탔다 4 /이정하
      열차는 도착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떠나고 있었다.
      역사의 낡은 목조 계단을 내려가며
      그 삐걱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생애가 그렇게 삐걱대는 소리를 들었다.
      취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마신 술이
      잠시 내 발걸음을 비틀거리게 했지만
      나는 일부러 꼿꼿한 발걸음으로 역사를 나섰다.
      철로변 플랫폼엔 비가 내리는데
      구멍 숭숭 뚫린 천막 지붕 사이로 비가 내리는데
      나보다 더 취한 눈으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고
      낡은 의자 위 보따리를 가슴에 품은 채 잠에 떨어진
      아낙네도 있었다. 밤화장 짙은 소녀의 한숨 같은
      담배 연기도 보였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외면할 수밖에, 밤열차를 타는 사람들 저마다
      사연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제 곧
      열차가 들어오면, 나는 나대로 또 저들은 저들대로
      그렇게 좀더 먼 곳으로 흘러가게 되리라.
      그렇게 흘러 흘러 우리가 닿는 곳은 어디일까.
      나는 지금 내 삶의 간이역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어느덧 열차는 어둠에 미끄러지듯 플랫폼으로 들어서고
      열차에 올라타며 나는 잠시 두리번거렸다.
      철저히 혼자였지만 혼자인 척하지 않기 위해.
      배웅 나올 사람도 없었지만 배웅 나올 사람이
      좀 늦나 보다, 하며. 아주 잠깐 그대를 떠올렸지만
      나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그대 내 맘속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며, 기다릴 그 누구도 없는
      비 오는 간이역에서 나는 밤열차를 탔다.
      이제는 정말 외로움과 동행이다.
      열차는 아직 떠나지 않았지만
      나는 벌써 떠나고 없었다.
      
       비 오는 간이역에서 밤열차를 탔다 5 /이정하
      나는 늘 혼자서 떠났다.
      누군들 혼자가 아니랴만
      내가 막상 필요로 할 때 그대는 없었다.
      그랬다, 삶이라는 건
      조금씩 조금씩 외로움에 친숙해진다는 것.
      그랬다, 사랑이라는 건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지는 것. 
      늦은 밤, 완행열차 차창 밖으로 별빛이 흐를 때
      나는 까닭 없이 한숨을 쉬었다.
      종착역 낯선 객지의 허름한 여인숙 문을 기웃거리며
      난 또 혼자라는 사실에 절망했고,
      그렇게 절망하다가 비 오는 거리 한구석에서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당신을 떠올려 보았다.
      

'문학 > 유명 시인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맨발/문태준-  (0) 2011.04.19
나를 위로하는 날/이해인  (0) 2011.04.14
길 가는 자의 노래/류시화  (0) 2011.04.12
거리에서 /류시화  (0) 2011.04.12
고슴도치 사랑/이정하   (0) 2011.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