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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억하고 싶은 글

고종 황제의 최후

by 이태일, 태라라 2015. 10. 3.
 
지은이  :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열 권의 저서와 일곱 권의 시집을 냈다, 현재 공인회계사로 활동하고 있다, 
동서양의 역사에 심취해 깊이 읽고 , 사상을 찾아내는 작업을 해왔으며,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과 뒤안길, 중국 5천 년 역사와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로마제국사, 
유럽 근현대사, 미국 건국사 그 이후까지, 한국사와 비교 연계하여 시로 집약했다. 
그의 시에는 미려한 시어가 없다, 형식과 전형도 없다. 그러나 역사의 사실과 진실을 드러내 오늘을 밝히고자 한다.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 
서태후는 청일전쟁에 소극적이었다. 
1887년부터 서태후는 거액의 돈을 투입 1894년 11월 7일에 있을 자신의 성대한 
환갑잔치를 위해 이화원을 시공 모든 국력을 여기에 집중하였다.
청일전쟁 패함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11월 16일 일한보호조약결이 강제로 체결하려고 하자 고종 황제는 분을 참지 못해 눈을 감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1905년 11월 17일 강요된 한일보호조약
시일야방성대곡 : 망국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란 글로 백성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생략  ........ "우리 황제 폐하의 성의가 강경하시어 거절하면 
그 조약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등 후작은 만일 그렇게 되면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저 豚犬(돈견)만도 못하는 우리 정부 대신들은 영리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위협에 못 이기는 체하고 매국노가 되었다, 
저 남한산성에서 항복문서를 찟은 김상헌만 못하고 또 할복한 정 온만 못하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 2천만 동포를 다시 대한단 말인가? 
아 ! 분하다 우리 2천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기 이래 4천년의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멸망하였구나 통재라! 
동포여! 동포여! 이날이여 방성대곡할 날이구나!"
 1907년 7월 20일 
중화전에서 황태자의 대리청정식을 거행했다.
 "대소 신민은 짐의 말의 귀를 기울이라 짐은 大朝(대조)의 명을 받들어 서정읠 대리하노라 
유신하는 이때 국시를 정하지 않으면  대한제곡에 큰 해가 될 것이니라..........
쇄국의 구습을 버리고 세계 만방의 적절한 조치에 따라 온 국민과 가티 중흥의 대업을 열고자 하노라 
도리를 아는 자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각자 자신의 직업을 지키며 안정하라......."P50
순종황제의 대관식
1907년 8월 3일 
서울에는 광무 연호를 隆熙(융희)로 바꾸었다. 
태황제 고종이 기거하는 경운궁을 덕을 쌓고 오래 살라는 뜻으로 德壽宮(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태황제 고종과 러시아 영사는 계획적으로 초대되지 않았고 예정대로 오전 10시에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순종 황제가 즉위하자 일본은 한일신협약을 맺어 통감이 내정을 간섭하고 
각 부에는 일본인 차관을 두어 차관정치를 시작하였다 
군대가 해산되고 경찰권과 사법권이 통감부로 넘어가 한국은 완전히 허수아비 정권이 되었다.
순종 황제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기고 고종의 셋째 아들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그것은 실의에 빠져 한숨만 짓고 있는 고종의 심사를 달래기 위한 술책이었다.
볼모 유학을 떠난 황태자
동경에 보내 개화된 문물을 수학케 하여 진보된 사상으리 배워야 한다는 구실을 붙여 일본으로 데려가고 말았다.
덕수궁과 창덕궁은 초상집과 같았다.
창경원 건립 
볼모 유학을 떠난 황태자를 배행하고 돌아온 이등 통감은 이완용을 시켜 창덕궁 순종 황제 앞에 나가게 했다 
창경궁에 동물원·  식물원 ·  박물관을 만들려는 계획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이등 통감이 덕수궁으로 들어갔다.......
"폐하 외신 이토오 히로부미는 돌아오는 길에 비록 작지만 선물을 가지고 돌아왔사옵니다."
"선물이라 무슨 선물이오?"
"우선 창경궁에 동양 최대의 동물원 · 식물원 · 박물관을 만들어서 한국 황실의 기쁨을 더하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게요? 동원원 · 식물원을 왜 하필이면 창경궁에...? 
그러고 보니 황실을 이젠 구경거리로 만들겠다 그 말이 아니오? 안 될 말이오!"
"하오나 신황제 폐화께서도 쾌히 윤허하시고 설계도 이미 마친 일이옵니다, P56
 동양척식회사 
1908년 12월 동양척식회사가 설립되었다. 
한국의 토지수탈을 위해 설립한 회사로서 창립 당시부터 그 사업을 약탈적인 것이었다.
식민지 약탈적인 것이었다.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 농업 · 수리사업 · 토지의 취득과 경영 및 처분이 
주민의 모집과 배치 이주민을 위한 필요품의 공급 및 생산품의 분배 위탁에 의한 
토지의 경영 정기예금의 수입 광공업 등과 농업의 경영면에 있어서 
구태의 봉건적 착취관계를 더욱 조직적으로 강화했다, 
그 실례로 5할이 넘는 소작료를 징수하고 대여곡물에 대하여는 2할이 넘는 고리로 추수 때에 현물로 징수하였다.
이 악명 높은 동양척식회사는 서울에 본점을 두었다가 
1917년 동경으로 옮겨 동양 각지에 그 사업을 확대하였다. 
한국에는 17개 지점과 52개의 지사를 설립 경제적 침략을 도모하였다.
 이등방문의 죽음
1909년 10월 26일 69세의 이등박문(이토오 히로부미)은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의사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그는 1901년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하여 한국에 있어서의 세력확보를 위해 
러시아와 협상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러일전쟁 후 주한 특파대사로서 
한국에 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되대통감이 되었다.
1909년에 한국 통감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들어가 다시 추밀원의 의장이 되었다,
 그 해 10월 만주 시찰과 러시아와의 협상을 위해 만주 하얼빈에 도착 영접행사 도중에 
안중근 의사의 총을 맞은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죽음
러시아 정부는  안중근을 일본 관헌에 인도하였다, 
한국의 사법권은 이미 일본으로 넘어가 버린 때여서 안중근은 일본 법에 의해 재판을 받아야 했다.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안중근 ............ 여순과 미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안중근 구명에 나섰다. 
러시아와 스폐인에서까지 변호사가 달려오고 영국인 변호사가 자발적인 변호를 맡고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진회는 일본에 사죄특사를 보내야 한다는 등 친일파들은 어쩔 줄을 몰라 전전긍긍하였다.
이때  친일파인 이완용(한일합방조약에 서명자P78)은 그해 12월 22일 명동 천주교회 앞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한 청년 하나가 이완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는 이완용의 배를 찌르고 체포된 그 청년은 
이재기(李在明)(1890~1910)이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는 3월 26일 여순항이 내려다 보이는 
나직한 언더거에서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고 이완용의 배를 찌른 21세의 이재명도 그 무렵 사형되었다.
 한일합방조약에 서명한 이완용
윤덕영으로부터 옥새함을 넘겨받은 이완용과 조종응은 순종 황제의 친임장을 만들어 
옥새를 찍어 들고 통감 데라우치에게로 달려갔다, 
통감부에서 마련한 한일합방조약에 일자를 기입하고 서명날인하는 것으로 조인은 간단히 끝났다. 
이 조약은 일주일 동안 비밀함에 보관되었다가 1910년 8월 29일 공포되었다.
 대한제국이 무너지던날
일본은 한일합방을 공포하면서 모든 것을 바꾸었다.
大韓帝國(대한제국)을 朝鮮(조선)으로 태황제 고종을 덕수궁 이태왕으로 황제를 창덕궁 이왕 전하로 
황태자를 이왕 세자로 격하시키고 대신과 각료들에게는 공훈에 따라 직위를 내렸다. 
총리대신 이완용도 백작이 되었다. 그 중에서 유길준 등 8명은 작위를 거부했다.
 자동차
1887년에는 세계 최초의 자동차가 등장했다.
미국의 포드는 1892년 자동차 조립에 성공하여 1899년에는 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고 기사장이 되었다.P86 
고종황제는 1903년 포드 자동차를 구입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가 되었다.
 광서제와 서태후의 죽음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가 죽고 이틀 후인 16일에 서태후가 74세로 죽었다, 
이 큰어머니와 조카의 집요한 싸움은 은산한 이야기고리로 남아 있다.
 엄귀비의 죽음
엄귀비는 아들 영친왕이 일본에서 소금뿌린 주먹밥을 먹고 있는 황동사진을 본 이후 
울다가 몸져누어 저녁 내내 헛소리를 하고 자정이 지나 삼경쯤에 운명하고 말았다.
 덕혜옹주 탄생
1912년 봄 5월에 상궁 양씨는 옹주를 순산하여 이름을 덕혜라 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안고 기뻐하였다. 덕혜를 안은 양 귀인가 마주하는 일로 위안이 되었다
1919년 1월 25일로 졍해진 영친왕의 결혼식을 파기하고 싶은 고종은 
가슴이 답답해 보리를 버럭 질렀다, "비상약이 있느냐?" 
"약이 떨어졋사옵니다."
"그래? 식혜나 자져오도록 하여라"
상궁이 들고 온 식혜 한 대접을 거든하게 마시고 토악질을 하면서 피를 토했다. 
고종은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이놈들! 나를 죽이려 드는군아!" 
전의가 달려왔으나 심장은 이미 멎어 있었다, 의문의 죽음! 덕수궁 뜰에는 곡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3월 3일 국장 ......................
1924년 영친왕이 마사코와 생후 8개월 된 아들 진을 데리고 일본에서 귀국 , 
누군가가 우유에 아편을 풀어 넣은 우유를 마시고 진이 죽었다. 
아기의 무덤은 홍릉의 숭인원으로 갔다.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일본인들은 왕실에 하나 남은 덕혜옹주를 일본으로 데라간다고 나섰다. 1925년 서울을 떠난 14세의 덕혜옹주..
 3김씨가 탄생하던 해
1925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김대중 대통령 탄생
1926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김종필총재 탄생
1927년 경상남도 거재에서 김영삼대통령  탄생.
이 때를 전후하여 세계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1924년 미국의 윌슨과 소련의 레닌이 사망하였고 1925년에는 중국의 손문이 타계하였다.
베를린의 영웅 마라톤 선수 손기정
1936년 제11회 올림픽대회가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마라톤 경기에 출전하여 손기정은 1위 남승용은 3위를 기록하여 일장기를 배를린 하늘에 높이 날렸다.
히틀러가 손기정 선수와 악수하는 장면이 기록영화에 나오기도 하였다.
 대한 애국가 
안익태 그는 평양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시절부터 독창과 바이올린에 뒤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숭실중학에 입학 미국인 선고사에게 음악의 기초를 배웠다.
그는 유학시절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 나가고 있던 안익태는 재미동포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스코틀랜드의 멜로디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 우리 민족만의 고유한 애국가를 만들 결심을 했다.
전반은 미국에서 후반은 유럽에서 완성 '대한 애국가'라고 이름하였다.
1936년 8월 마침 베를린에서 개최된 올림픽대회에서 이 곳을 알려야겠다고 달려갔다.
개회식 후 일본 대표선수로 출전한 손기정 · 남승용  ·  김용식  ·  이규환  ·  장이진 등이 있는 
스탠드를 향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을 힘찬 평안도 사투리로 목청을 높어 불렀다. 
그 후 애국가는 미국의 대한민국회와 중경의 대한민국 임심정부에 보내져 해외 망명정부의 국가로 불리게 되었다.
1945년 4월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
춤추고 노래한 한민족 1945년 독립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하던 날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환희가 넘쳤다. 
해외동포도 태극리를 흔들면 만세를 불렀다.
"어둡고 괴로워라 빔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아아 해방의 해방의 깃발 날린다"
후기 : 일제 36년의 역사는 명성황후도 막지 못한 그 외세 앞에 고종 황제가 주저않아 방황했고 
순종 황제가 어쩔 줄을 몰라할 때 모든 허물을 혼자 뒤집어쓰고 
몰매를 맞아야 했던 이완용 피할 수 없는 역사의 매질을 당한 이완용
나라를 빼앗끼고 글과 언어를 잃고도 모자라 창씨개명을 해야 했던 그런 기억들 ..
피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
국민교육과 외교를 통해서 일본 사람들을 하나라도 죽여야 한다는 생각
그런 생각들이 서로 엉켜 폭탄을 던지고 총을 쏘는 것이 곧 애국이라는 흑백논리가 우세했던 게 사실이다. 
백년대계보다는 순간의 영웅심리가 가시적 애국이라고 그쪽에다가 무게를 실어준 우리의 역사.
지금 우리나라에는 주인은 없고 머슴들로 가득 찬 느낌이다, 
주먹질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누구를 위해 주먹질하고
누구를 위해 자해행위를 하고
누구글 위해서 욕설을 퍼부어야 하는가
이제는 우리 모두 주인이 되어야 할 때이다.
길거리에 버려진 휴지가 있으면 집어다가 휴지통에 넣고 길바닥에 넘어진 아이가 있으면 일으켜 세워 
먼지를 털어 주는 그런 성숙한 시민의식을 키워 나가야 할 때이다. 
원망하고 투정하는 시기가 아나라는 것이다, 모두가 우리의 것이니까......
2004년 봄
느낌 한마디 
고종황제는 태어나서 죽음의 이르기까지 비참한 생애를 살아갔다. 
아내 명성왕후의 죽음 자신의 독살, 순종임금의 독살로 죽어간다.  
나라잃은 서러움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간 왕자나  옹주의 처절한 삶..............
어쩌면 조선왕조의 무대가 내려지는 장면이었다.
한편 
영웅들이 죽어가는 반면  새시대를 위해 1925년에서 1927년 사이에 
대한민국을 이어갈 대동령이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세월의 흐름속에 슬픔과 기쁨은 공존해 있는 것 같다.
일본이 우리에게 행한일은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말아야 한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 나라없이는 어떤 행복도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애국해야 한다는 마음이 절절히 내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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