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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억하고 싶은 글

김좌진, 홍범도

by 이태일, 태라라 2011. 6. 8.

김좌진 장군은 잘 알려졌지만 홍범도님도 계셨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신 후에 소식은 모릅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김좌진 장군의 부대가 일본군에 포위 되었을 때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구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태라라-

~~홍범도~~ 
청년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집에 기거하면서 머슴살이를 했다. 
1883년(고종 20) 평양우영(平壤右營)에서 나팔수로 복무하다 탈영하여 
황해도 수안 총령(蔥嶺)의 제지소에서 3년간 일했다. 
1891년경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2년간 상좌로 있으면서 
지담(止潭)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승군(僧軍)의 활동 등에 대해 들으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강원도 철령(鐵嶺)에서 소규모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이듬해 14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함경남도 안변으로 가 
석왕사(釋王寺)에 주둔하고 있던 유인석(柳麟錫) 의병과 연합하여 싸웠다. 
을미의병 해산 이후 체포를 피해 돌아다니다 
북청에서 산포수(山砲手) 생활을 하면서 소규모 항쟁을 계속했다. 
1907년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일제는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만들어 항쟁의 확산을 저지하려 했다. 
이를 계기로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송상봉(宋相鳳)·허근(許瑾) 등과 함께 
북청 후치령(厚峙嶺)에서 포수·농민 들을 모아 다시 기병했다. 
처음에는 600~700명의 부대원들을 이끌고 기동 유격전술을 펼쳤으나, 
일본군이 대규모 토벌 공세에 나서자 
소규모 부대를 중심으로 한 매복·기습 전술로 전환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07년 12월 삼수 전투에서 일본군 함흥·북청·갑산 수비대를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이원·단천·혜산 등지에서 37회에 걸친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진회원(一進會員)들을 사주하여 아내 이씨(李氏)를 체포·처형했다. 
이후 갑산·무산·종성에서 전투를 벌이다 국내에서의 항쟁의 한계와 근거지 건설에 기반을 둔 
지속적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느껴 지린[吉林]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1920년 11월 22일 간도 일본 총영사관이 작성한 청산리전투에 대한 보고서로서 
김좌진, 홍범도 부대의 행동에 관해 서술되었다. 
청산리(靑山里)전투는 1920년 10월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대파한 전투이다. 
이 싸움에서 치욕적인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만주 전역에서 한국동포를 무참히 학살한 간도참변(間島慘變)을 저질렀다.
의병전쟁 및 항일독립전쟁기의 대표적 장군으로 
봉오동(鳳梧洞)·청산리(靑山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민족주의와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철저한 무장투쟁노선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일명 범도(範道).

김좌진(1889-1930);독립운동가, 북로군정서 총사령

 유관순(1902-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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