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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유명 시인의 시

철창에 기대어/김남주시인

by 이태일, 태라라 2013. 5. 17.

 

 

 

    9. 철창에 기대어 잡아보라고 손목 한번 주지 않던 사람이 그 손으로 편지를 써 보냈다오 옥바라지를 해주고 싶어요 허락해주세요 이리 꼬시고 저리 꼬시고 별의별 수작을 다해도 입술 한번 주지 않던 사람이 그 입으로 속삭였다오 면회장에 와서 기다리겠어요 건강을 소홀히 하지 마세요 15년 징역살이를 다하고 나면 내 나이 마흔아홉 살 이런 사람 기다려 무엇에 쓰겠다는 것일까 5년 살고 벌써 반백이 다된 머리를 철창에 기대고 사내는 후회하고 있다오 어쩌자고 여자 부탁 선뜻 받아들였던고 학살 2 오월 어느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리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앗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대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둔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날 낮이었다 낮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이민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민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낮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낮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날 낮이었다 낮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낮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잡이 없었다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낮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리 처참하지는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리 치밀하지는 않았으리 5. 이 세상에 사슬로 이렇게 나를 묶어놓고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압제자 말고는 벽으로 이렇게 나를 가둬놓고 주먹밥으로 이렇게 나를 목메이게 해 놓고 배부를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부자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 사람을 이렇게 해 놓고 개처럼 묶어 놓고 사람을 이렇게 해 놓고 짐승처럼 가둬 놓고 사람을 이렇게 해 놓고 주먹밥으로 목메이게 해 놓고 잠자리에서 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압제자 말고 부자들 말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에 하나라도 만에 하나라도 세상에 그럴 사람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 한 번 나와 봐라 나와서 이 사람을 보아라 사슬 묶인 손으로 주먹밥을 쥐고 있는 이 사람을 보아라 이 사람 앞에서 묶인 팔다리 앞에서 나는 자유다라고 어디 한 번 활보해 봐라 이 사람 앞에서 굶주린 얼굴 앞에서 나는 배부르다라고 어디 한 번 외쳐 봐라 이 사람 앞에서 등을 돌리고 이 사람 앞에서 얼굴을 돌리고 마음 편할 사람 있으면 어디 한 번 있어 봐라 남의 자유 억누르고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남의 밥 앗아먹고 배부를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압제자 말고 부자들 말고는 마지막 인사 오늘밤 아니면 내일 내일밤 아니면 모레 넘어갈 것 같네 감옥으로 증오했기 때문이라네 재산과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네 노동의 대지와 피곤한 농부의 잠자리를 한마디 남기고 싶네 떠나는 마당에서 어쩌면 이 밤이 이승에서 하는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르니 유언이라 해도 무방하겠네 역사의 변혁에서 최고의 덕목은 열정이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된 것은 아니네 지혜가 있어야 하네 지혜와 열정의 통일 이것이 승리의 별자리를 점지해준다네 한마디 더 하고 싶네 적을 공격하기에 앞서 반격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지않으면 공격을 삼가게 패배에서 맛본 피의 교훈이네 잘 있게 친구 그대 손에 그대 가슴에 나의 칼 나의 피를 남겨두고 가네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만세! 진혼가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꽁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의 싸움은 허리가 되었다 당신의 배꼽에서 구부러졌다 노예가 되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노라 당신의 발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양심 나의 싸움은 미군(迷宮)이 되어 심연으로 떨어졌다 삽살개가 되라면 기꺼이 삽살개가 되어 당신의 손이 되어 발가락이 되어 혀가 되어 삽살개 삼천만 마리의 충성으로 쓰다듬어 주고 비벼 주고 핥아 주겠노라 더 이상 나의 육신을 학대 말라고 하찮은 것이지만 육신은 나의 유일(唯一)의 확실성(確實性)이라고 나는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손발을 비볐다 나는 6. 어머니 어머니 그 옛날 제가 외지로 나설 때마다 동구 밖 신작로에 나오셔서 차 조심하고 사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시던 어머니 가가 먼 길 구풋하면 먹어두라고 수수떡 계란이며 건네주시고 옷고름 콧잔등에 찍어 우시던 어머니 이제는 예순 넘은 나이로 끌려간 자식놈이 그리워 철이 바뀔 때마다 옷가지 챙겨 들고 흰 고개 검은 고개 넘나드시는 어머니 서러워하거나 노여워 마세요 날 두고 언 놈이 뭔 말을 하더라도 내 또래 친구들 발길 뜸해지더라도 어머니 저를 결정할 사람은 저들이 아니니까요 사형이다 무기다 10년이다 사형 구형 놓기를 남의 집 개이름 부르듯 하는 저 당당한 검사 나으리가 아닌니까요 높은 공부하여 높은 자리에 앉아 사슬 묶인 나를 굽어보는 저 준엄한 판사 나으리가 아니니까요 나를 결정할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고 날 낳으신 당신이고 당신 같으신 어머니들이고 날 키워 준 이 산하 이 하늘이니까요 해방된 민중이고 통일된 조국의 별이니까요. 7.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다른 감옥으로 압송되어 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구옥일까 아니면 대전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 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나도 여기서 차에서 내려 아이들이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저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나도 그들과 함께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사슬 풀고 오라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을 걷고 싶다 가다가 숨이 차면 아픈 다리 쉬었다 가고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집으로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 차는 멈춰 주지를 않는다 강을 건너 내를 끼고 땅거미가 내린 산기슭을 달린다 강 건너 마을에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하얗게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8. 편지 산길로 접어드는 양복쟁이만 보아도 혹시나 산감이 아닐까 혹시나 면직원이 아닐까 가슴 조이시던 어머니 헛간이며 부엌엔들 청솔가지 한 가지 보이는 게 없을까 허둥대시던 어머니 빈 항아리엔들 혹시나 술이 차지 않았을까 허리 굽혀 코 박고 없는 냄새 술 냄새 맡으시던 어머니 늦가을 어느 해 추곡 수매 퇴짜 맞고 빈 속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 앞에 밥상을 놓으시며 우시던 어머니 순사 한나 나고 산감 한나 나고 면서기 한나 나고 한 지안에 세 사람만 나면 웬만한 바람엔들 문풍지가 울까부냐 아버지 푸념 앞에 고개 떨구시고 잡혀간 아들 생각에 다시 우셨다던 어머니 동구 밖 어귀에서 오토바이 소리만 나도 혹시나 또 누구 잡아가지나 않을까 머리끝 곤두세워 먼 산 마른 하늘밖에 쳐다볼 줄 모르시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다시는 동구 밖을 나서지 마세요 수수떡 옷가지 보자기에 싸들고 다시는 신작로 가에는 나서지 마세요 끌려간 아들의 서울 꿈에라도 못 보시면 한시라도 못 살세라 먼 길 팍팍한 길 다시는 나서지 마세요 허기진 들판 숨가쁜 골짜기 어머니 시름의 바다 건너 선창가 정거장에는 다시는 나오지 마세요 어머니 10. 권력의 담 나는 나가야 한다 살아서 살아서 더욱 튼튼한 몸으로 나는 보여줘야 한다 나가서 나가서 더욱 의연한 모습을 나는 또한 보여줘야 한다 놈들에게 감옥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전사의 휴식처 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무기를 바로잡기 위해 전선에서 잠시 물러나 있었다는 것을 보라 창살에 타오르는 이 증오의 눈을 보라 주먹으로 모아지는 이 온몸의 피를 장군들 이민족의 앞잡이들 압제와 폭정의 화신 자유의 사형집행자들 기다려라 기다려라 기다려라 나는 싸울 것이다 살아서 나가서 피투성이로 빼앗긴 내 조국의 깃발과 자유와 위대함을 되찾을 때까지 토지가 농민의 것이 되고 공장이 노동자의 것이 되고 권력이 민주의 것이 될 때까지.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을 눈물을 나워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밖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함께 갑시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김남주 詩 변계원 가락 안치환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에 동지 모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해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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