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의 시 모음
추억이 없다
맹인 부부 가수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비닐우산
우리가 어느 별에서
너에게
슬픔이 기쁨에게
슬픔 많은 이세상도
슬픔으로 가는 길
낙화
수선화에게
모밀꽃
기다리는 편지
또 기다리는 편지
여름밤
꽃지는 저녁
잎새에게
철길에 앉아
연어
아버지의 나이
달팽이
종소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동진
별똥별
칼 날
가을
겨울강
거짓말의 시를 쓰면서
꿀벌
밥먹는 법
하늘의 그물
영안실 입구
북한산 명태
모른다
리기다 소나무
별들은 따뜻하다
구두 닦는 소년
끝끝내
새점을 치며
세한도
성의(聖衣)
사 랑
희망은 아름답다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강변역에서
눈부처
모래
이별 노래
청량리 역
그는
모두 드리리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봄눈
절벽에 대한 몇 가지 충고
반지의 의미
겨울강에서
나무에 대하여
풍경 달다
까닭
그대의 밥그릇에 내 마음의 첫눈을 담아 드리리
꽃을 보려면
부치지 않은 편지
가 을 꽃
그리운 목소리
후 회
우박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새벽
거지인형
귀뚜라미에게 받은 짧은 편지
미안하다
누더기별
비 오는 사람
저녁별
상처는 스승이다
시인들이 술 마시는 영안실
아버지의 가을
장작을 패다가
끝끝내
발 자 국
밤길에서
겨울꽃
벗에게 부탁함
사랑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바닷가에 대하여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
비 오는 사람
꽃
햇살에게
물 위를 걸으며
슬픔은 누구인가
푸른 애인
가시
마음에 집이 없으면
갈대는 새벽에 울지 않는다
새벽기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별 하나의 나그네가 되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음부처
모닥불을 밟으며
연인
쓸쓸한 편지
가을편지
너의 날개
내 마음속의 마음이
나뭇잎을 닦다
당신에게
물 위에 쓴 시
결혼에 대하여
꿈
새벽의 시
우리가 어느 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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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 없다
나무에게는 무덤이 없다
바람에게는 무덤이 없다
깨꽃이 지고 메밀꽃이 져도
꽃들에게는 무덤이 없다
나에게는 추억이 없다
추억으로 걸어가던 들판이 없다
첫눈 오던 날 첫키스를 나누던
그 집 앞 골목길도 사라지고 없다
추억이 없으면 무덤도 없다
추억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꽃샘바람 부는 이 봄날에
꽃으로 피어나던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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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 부부 가수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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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불국사 종루 근처 공중전화 앞을 서성거리다가
너에게 전화를 건다
석가탑이 무너져내린다
공중전화카드를 꺼내어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린 뒤
다시 또 전화를 건다
다보탑이 무너져내린다
다시 또 공중전화카드를 꺼내어
너에게 전화를 건다
청운교가 무너져내린다
대웅전이 무너져내린다
석등의 맑은 불이 꺼진다
나는 급히 수화기를 들고
그대로 종루로 달려가
쇠줄에 매달린 종메가 되어
힘껏 종을 울린다
너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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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사람을 멀리 하고 길을 걷는다.
살아갈수록 외로와진다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외로와
외롭고 마음 쓰라리게 걸어가는
들길에 서서
타오르는 들불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고독하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면
어둠 속에서 그의 등불이 꺼지고
가랑잎 위에는 가랑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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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우산
오늘도 비를 맞으며 걷는 일보다
바람에 뒤집히는 일이 더 즐겁습니다
끝내는 바람에 뒤집히다 못해
빗길에 버려지는 일이 더 즐겁습니다
비 오는 날마다
나는 하늘의 작은 가슴이므로
그대 가슴에 연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으므로
오늘도 바람에 뒤집히는 일보다
빗길에 버려지는 일이 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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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느 별에서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랑의 모닥불으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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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 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 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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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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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많은 이 세상도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걸어 보아라.
첫눈 내리는 새벽 눈길 걸을 것이니
지난 가을 낙엽 줍던 소년과 함께
눈길마다 눈사람을 세울 것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걸어 보아라.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던 사람들이
눈사람을 만나러 돌아올 것이니
살아갈수록 잠마저 오지 않는 그대에게
평등의 눈물들을 보여 주면서
슬픔으로 슬픔을 잊게 할 것이니
새벽의 절망을 두려워 말고
부질없이 봄밤의 기쁨을 서두르지 말고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살아보아라.
슬픔 많은 사람끼리 살아가며는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아름다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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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으로 가는 길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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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
섬진강에 꽃 떨어진다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결코 향기는 팔지 않는
매화꽃 떨어진다
지리산
어느 절에 계신 큰스님을 다비하는
불꽃인가
불꽃의 맑은 아름다움인가
섬진강에 가서
지는 매화꽃을 보지 않고
섣불리
인생을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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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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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밀꽃
1
어느 女人의
슬픈 넋이 실린양
해쪽이 웃고 쓸쓸한
모밀꽃
모밀꽃은
하이얀꽃
그 女人의 마음인양
깨끗이 피는꽃
모밀꽃은
가난한꽃
그 女人의 마음인양
외로이 피는꽃
해마다 가을이와
하이얀이 피여나도
그마음 달랠길없어
햇쪽이 웃고 시드는꽃
세모진 주머니를 지어
까-만 주머니 가득
하이얀 비밀을 담어놓고
아모말없이 시드는꽃
2
올해 같이
가무는 해는
들에 가-득
모밀꽃이 피여나
모밀꽃이
많이 피는해는
마음이 가난하고
나라가 가난하고
올해같이
목마른 해는
젊은이 가슴가득
모밀꽃이 피여나
모밀꽃이
많이피는해는
마음이 가난하고
나라가 가난하고
하이얀 모밀꽃을
위로해 주지못하고
주머니 가득
하이얀 비밀을
어루만저 주지않어
몇해만큼 한번씩
들에가득
마음에 가득
모밀꽃이 피여나기 위하야
날은 가물고
목은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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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편지
서울에도 오랑캐꽃이 피었습니다
쑥부쟁이 문둥이풀 마늘꽃과 함께
피어나도 배가 고픈 오랑캐꽃들이
산동네마다 무더기로 피었습니다
리어카를 세워놓고 병든 아버지는
오랑캐꽃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물지게를 지고 산비탈을 오르던 소년은
새끼줄에 끼운 연탄을 사들고
노을 지는 산 아래 아파트를 바라보며
오랑캐꽃 한 송이를 꺾었습니다
인생은 풀과 같은 것이라고
가장 중요한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산 위를 오르며 개척교회 전도사는
술 취한 아버지에게 자꾸 말을 걸고
아버지는 오랑캐꽃 더미 속에 파묻혀
말이 없었습니다
오랑캐꽃 잎새마다 밤은 오고
배고픈 사람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
산그늘에 모여 앉아 눈물을 돌로 내려찍는데
가난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 함께 가난을 나누면 된다는데
산다는 것은 남몰래 울어보는 것인지
밤이 오는 서울의 산동네마다
피다 만 오랑캐꽃들이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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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기다리는 편지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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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너는 죽어 별이 되고
나는 살아 밤이 되네
한 사람의 눈물을 기다리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촛불 들고
통곡하는 밤은 깊어
강물 속에 떨어지는
별빛도 서러워라
새벽길 걸어가다 하늘을 보면
하늘은 때때로 누가 용서하는가
너는 슬픈 소나기
그리운 불빛
죽음의 마을에도 별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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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지는 저녁
꽃이 진다고 아예 다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적 없다
꽃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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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새에게
하느님도 쓸쓸하시다
하느님도 인간에게 사랑을 바라다가 쓸쓸하시다
오늘의 마지막 열차가 소리없이 지나가는 들녘에 서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지 알 수 없어라
그대는 광한루 돌담길을 홀로 걷다가
많은 것을 잃었으나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나니
미소로서 그대를 통과하던 밝은 햇살과
온몸을 간지럽히던 싸락눈의 정다움을 기억하시라
뿌리째 뒤흔들던 간밤의 폭풍우와
칼을 들고 설치던 병정개미들의 오만함을 용서하시라
우듬지 위로 날마다 감옥을 만들고
감옥이 너무 너르다고 생각한 것을 잘못이었나니
그대 가슴 위로 똥을 누고 가는 저 새들이
그 얼마나 아름다우냐
사랑하고 싶은 인간이 없어
하느님도 쓸쓸한 저녁 무렵
삶은 때때로 키스처럼 반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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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에 앉아
철길에 앉아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철길에 앉아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멀리 기차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무말이 없었다.
기차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아무말이 없었다.
코스모스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기차가 눈안에 들어왔다.
지평선을 뚫고 성난 멧돼지 처럼 씩씩거리며
기차는 곧 나를 덮칠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낮달이 놀란 얼굴을 하고
해바라기가 고개를 흔들며 빨리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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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
바다를 떠나 너의 손을 잡는다
사람의 손에게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것이 그 얼마 만인가
거친 폭포를 뛰어넘어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단지 한 마리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
울지 마라
인생을 눈물로 가득 채우지 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름답다
오늘 내가 꾼 꿈은 네가 꾼 꿈의 그림자 일뿐
너의 사랑하고 죽으러 가는 한낮
숨은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총총히 우리를 내려다본다
이제 곧 마른 강바닥에 나의 은빛 시체가 떠오르리라
배고픈 별빛들이 오랜만에 나를 포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밤을 밝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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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나이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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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내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떠나지 않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달은 차돌같이 차다
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 이다
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이슬을 밟으며
내가 가야 할 길 앞에서 누가 오고 있다.
죄없는 소년이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아마 아침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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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사람은 죽을 때에
한번은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새들도 죽을 때에
푸른 하늘을 향해
한번은 맑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고 죽는다는데
나 죽을 때에
한번도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지 못하고
눈길에 핏방울만 남기게 될까봐 두려워라
풀잎도 죽을 때에
아름다운 종소리를 남기고 죽는다는데.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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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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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장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내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그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벋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형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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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에
내가 너를 생각하는 줄
넌 모르지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는 순간에
내가 너의 눈물을 생각하는 줄
넌 모르지
내가 너의 눈물이 되어 떨어지는 줄
넌 모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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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날
칼날 위를 걸어서 간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피는 나지 않는다
눈이 내린다
보라
칼날과 칼날 사이로
겨울이 지나가고
개미가 지나간다
칼날 위를 맨발로 걷기 위해서는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뿐
우리는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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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 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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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강
꽝꽝 언 겨울강이
왜 밤마다 쩡쩡 울음소리를 내는지
너희는 아느냐
별들도 잠들지 못하고
왜 끝내는 겨울강을 따라 울고야 마는지
너희는 아느냐
산 채로 인간의 초고추장에 찍혀 먹힌
어린 빙어들이 너무 불쌍해
겨울강이 참다참다 끝내는
터뜨린 울음인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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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시를 쓰면서
창밖에 기대어 흰눈을 바라보며
얼마나 거짓말을 잘 할 수 있었으면
詩로써 거짓말을 다 할 수 있을까.
거짓말을 통하여 진실에 이르는
거짓말의 詩를 쓸 수 있을까.
거짓말의 詩를 읽고 겨울밤에는
그 누가 홀로 울 수 있을까.
밤이 내리고 눈이 내려도
단 한번의 참회도 사랑도 없이
얼마나 속이는 일이 즐거웠으면
품팔이 하는 거짓말의 詩人이 될 수 있을까.
생활은 詩보다 더 진실하고
詩는 삶보다 더 진하다는데
밥이 될 수 없는 거짓말의 詩를 쓰면서
어떻게 살아 있기를 바라며
어떻게 한 사람의
희망이길 바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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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에서
아버지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임진강 샛강가로 저를 찾지 마세요
찬 강바람이 아버지의 야윈 옷깃을 스치면
오히려 제 가슴이 춥고 서럽습니다
가난한 아버지의 작은 볏단 갔았던
저는 결코 눈물 흘리지 않았으므로
아버지 이제 그만 발걸음을 돌리세요
삶이란 마침내 강물 같은 것이라고
강물 위에 부서지는 햇살 같은 것이라고
아버지도 저만치 강물이 되어
뒤돌아보지 말고 흘러가세요
이곳에도 그리움 때문에 꽃은 피고
기다리는 자의 새벽도 밝아옵니다
길 잃은 임진강의 왜가리들은
더 따뜻한 곳을 찾아 길을 떠나고
길을 기다리는 자의 새벽길 되어
어둠의 그림자로 햇살이 되어
저도 이제 어디론가 길 떠납니다
찬 겨울 밤하늘에 초승달 뜨고
초승달 비껴가며 흰 기러기떼 날면
그 어디쯤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오늘도 샛강가로 저를 찾으신
강가에 얼어붙은 검불 같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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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
네가 나는 곳까지
나는 날지 못한다
너는 집을 떠나서 돌아오지만
나는 집을 떠나면 돌아오지 못한다
네 가슴의 피는 시냇물처럼 흐르고
너의 뼈는 나의 뼈보다 튼튼하다
향기를 먹은 너의 혀는 부드러우나
나의 혀는 모래알만 쏘다닐 뿐이다
너는 우는 아이에게 꿀을 먹이고
가난한 자에게 단꿀을 준다
나는 아직도 아직도
너의 꿀을 만들지 못한다
너는 너의 단 하나 목숨과 바꾸는
무서운 바늘침을 가졌으나
나는 단 한 번 내 목숨과 맞바꿀
쓰디쓴 사랑도 가지지 못한다
하늘도 별도 잃지 않는
너는 지난 겨울 꽁꽁 언
별 속에 피는 장미를 키우지만
나는 이 땅에
한 그루 꽃나무도 키워보지 못한다
복사꽃 살구꽃 찔레꽃이 지면 우는
너의 눈물은 이제 달디단 꿀이다
나의 눈물도 이제 너의 달디단 꿀이다
저녁이 오면
너의 들녘에서 돌아와
모든 슬픔을 꿀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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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먹는 법
밥상앞에
무릎을 꿇지 말것
눈물로 만든 밥보다
모래로 만든 밥을 먼저 먹을것
무엇보다도
전시된 밥은 먹지 말것
먹더라도 혼자 먹을것
아니면 차라리 굶을것
굶어서 가벼워질것
때때로
바람부는 날이면
풀잎을 햇살에 비벼먹을것
그래도 배가 고프면
입을 없앨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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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그물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 둘 떼지어 빠져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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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실 입구
왜 거기까지 갔니
왜 거기까지 가서 나를 부르니
마지막 너를 만나러
영안실 입구
검은 화살표를 따라
어디까지 가니
어디까지 가야 하니
돌아서버리고 싶어
들어가고 싶지 않아
벗들은 모여 흐린 불빛끼리
소주잔을 나누고
떠들썩하게 화투를 치는데
관 속에 누워
너는 뭘 하니
무엇을 버리고 떠나니
정말 사랑은 버렸니
별들이 왜 어둠속에서 빛나는지
아는 데에 일생이 걸렸다는
너의 말은 정말이니
흰 국화꽃 향기에 취한
내 인생의 저녁
불빛도 없는 길
나는 아직 아무것도
버린 것이 없는데
어디로 가니
내가 따라가도 좋겠니
운명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
너와 나의 마지막
만남의 장소
어느 지하철역 입구에서처럼
차표를 끊고 어디로 가니
내가 따라가지 않아도
쓸쓸하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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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명태
하늘은 붉고 날은 흐리다
어머니는 오늘도 겨울산에 올라
북으로 간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너 무슨 그리움의 죄가 그리 많아서
원산 덕장 찬바람 속에 매달려 있었느냐
하늘 향해 겨우내 입을 딱 벌리고
두 눈 부릅뜬 채 기다리고 있었느냐
북으로 간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온몸에 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대관령 눈보라에 황태가 되어
북녘 하늘 바라보다 온몸이 뜯기나니
네 가슴은 아직도 동해의 푸른 물결
이제는 죽음도 눈물도 아프지 않아
흰 새벽 찬바람에 눈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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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사람들은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을 모른다
사랑이 다 끝난 뒤에도 끝난 줄을 모른다
창 밖에 내리던 누더기눈도
내리다 지치면 숨을 죽이고
새들도 지치면 돌아갈 줄 아는데
사람들은 누더기가 되어서도 돌아갈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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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기다 소나무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 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장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나서 비로소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걸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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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은 따뜻하다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론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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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닦는 소년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통에 새벽별 가득 따 담고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골고루 나눠 주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하루 내 길바닥에 홀로 앉아서
사람들 발 아래 짖밟혀 나뒹구는
지난밤 별똥별도 주워서 닦고
하늘 숨은 낮별도 꺼내 닦는다
이 세상 별? 한 손에 모아
어머니 아침마다 거울을 닦듯
구두 닦는 사람들 목숨 닦는다
묵숨 위에 내려앉은 먼지 닦는다
저녁별 가득 든 구두통 매고
겨울밤 골목길 걸어서 가면
사람들은 하나씩 별을 안고 돌아가고
발자국에 고이는 발바람 소리 따라
가랑잎 같은 손만 굴러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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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끝내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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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점을 치며
눈 내리는 날
경기도 성남시
모란시장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천원짜리 한 장 내밀고
새점을 치면서
어린 새에게 묻는다.
나 같은 인간은 맞아 죽어도 싸지만
어떻게 좀 안되겠느냐고
묻는다
새장에 갇힌
어린 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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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영등포역 어느 뒷골목에서 봤다고 하고
청량리역 어느 무료급식소에서 봤다고 하는
아버지를 찾아 한겨울 내내
서울을 떠돌다가
동부시립병원 행려병동으로 실려가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나가는 행려병자들을 보고 돌아와
늙은 소나무 한그루 청정히 눈을 맞고 서 있는
아버지의 텅 빈 방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다
바람은 차고 달은 춥다
솔가지에 내린 눈은 더이상 아무 데도 내릴 데가 없다
젊은 날 모내기를 끝내고 찍은
아버지의 빛바랜 사진 옆에 걸려 있는
세한도 속으로
새 한마리 날아와 앉아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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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聖衣)
자정 넘은 시각
지하철 입구 계단 밑
냉동장미 다발이 버려져 있는
현금인출기 옆 모서리
라면박스를 깔고
아들 둘을 껴안은 채
편안히 잠들어 있는 여자
가랑잎도 나뒹굴지 않았던
지난 가을 내내 어디서 노숙을 한 것일까
온몸에 누더기를 걸치고
스스로 서울의 감옥이 된
창문도 없는 여자가
잠시 잠에서 깨어나 옷을 벗는다
겹겹이 껴입은 옷을 벗고 또 벗어
아들에게 입히다가 다시 잠이 든다
자정이 넘은 시각
첫눈이 내리는
지하철역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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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랑
강가에 초승달 뜬다
연어떼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그네 한 사람이 술에 취해
강가에 엎드려 있다
연어 한 마리가 나그네의 가슴에
뜨겁게 산란을 하고
고요히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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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아름답다
?
창은 별이 빛날 때만 창이다
희망은 희망을 가질 때만 희망이다
창은 길이 보이고 바람이 불 때만 아름답다
희망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때만 아름답다
나그네여, 그래도 이 절망과 어둠 속에서
창을 열고 별을 노래하는 슬픈 사람이 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희망을 낳지 않는데
나그네여, 그날밤 총소리에 쫓기기며 길을 잃고
죽음의 산길 타던 나그네여
바다가 있어야만 산은 아름답고
별이 빛나야만 창은 아름답다
희망은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창은 들의 꽃
바람 부는 대로 피었다 사라지는 한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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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잠이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하여
잠이 들었다가도 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기 위하여
그 별똥별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하여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가끔은 외로운 낮들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은 인간을 위해 우시는 하느님의
눈물도 받아 둔다
누구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번 들여다보면
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하느님 눈물이
새들의 깃텃에 고요히 이슬처럼
몇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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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역에서
강변역에서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산에서
저녁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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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처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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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모래가 되어본 자만이
낙타가 될 수 있다
낙타가 되어본 자만이
사막이 될 수 있다
사막이 되어본 자만이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이 되어본 자만이
모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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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노래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는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를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는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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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역
정선 아리랑 한가락이 울며 내려서
성바오로병원 건너
창녀들이 사는 뒷골목으로 퍼져가더라
눈보라를 뒤집어쓴
태백산 주목 한 그루가 울며 내려서
정선 아라리 뒤를 황급히 따라가더라
정동진의 맑은 아침 햇살도 내려서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다가
찰옥수수 파는 할머니 손을
환히 밝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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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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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드리리
그대의 밥그릇에 내 마음의 첫눈을 담아 드리리
그대의 국그릇에 내 마음의 해골을 담아드리리
나를 찔러 죽이고 강가에 버렸던 피묻은 칼 한 자루
강물에 씻어 다시 그대의 손아귀에 쥐어 드리리
아직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
아직도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려운지
미나리 다듬듯 내마음의 뼈다귀들을 다듬어
그대의 차디찬 술잔 곁에 놓아 드리리
마지막 남은 한 방울 눈물까지도
말라버린 나의 검은 혓바닥까지도
그대의 식탁위에 토막토막 잘라 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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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왜 낮은데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시월의 붉은 달이 지고
창밖에 따스한 불빛이 그리운 날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져 썩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한 잎 낙엽으로 썩어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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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봄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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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에 대한 몇 가지 충고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절벽 아래로 보이는 바다가 되라.
절벽 끝에 튼튼하게 뿌리를 뻗은
저 솔가지 끝에 앉은 새들이 되라.
절벽을 만나거든 그만 절벽이 되라
기어이 절벽을 기어오르는 저 개미떼가 되라
그 개미떼들이 망망히 바라보는 수평선이 되라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씩 절벽은 있다
언젠가는 기어이 올라가야 할
언젠가는 기어이 내려와야 할
외로운 절벽이 하나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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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의미
만남에 대하여 기도하자는 것이다
만남에 대하여 감사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아름답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순결하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마음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사랑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꽃이 진다고 울지 말자는 것이다
스스로 꽃이 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가난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영원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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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강에서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겨울강 강언덕에 눈보라 몰아쳐도
눈보라에 으스스 내 몸이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흘러가 흐느끼지 않아도
끝끝내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어
쓰러지면 일어서는 갈대가 되어
청산이 소리치면 소리쳐 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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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대하여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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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달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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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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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밥그릇에 내 마음의 첫눈을 담아 드리리
그대의 국그릇에 내 마음의 해골을 담아드리리
나를 찔러 죽이고 강가에 버렸던 피묻은 칼 한 자루
강물에 씻어 다시 그대의 손아귀에 쥐어 드리리
아직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
아직도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려운지
미나리 다듬듯 내마음의 뼈다귀들을 다듬어
그대의 차디찬 술잔 곁에 놓아 드리리
마지막 남은 한 방울 눈물까지도
말라버린 나의 검은 혓바닥까지도
그대의 식탁위에 토막토막 잘라 드리리...
구두 닦는 소년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통에 새벽별 가득 따 담고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골고루 나눠 주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하루 내 길바닥에 홀로 앉아서
사람들 발 아래 짖밟혀 나뒹구는
지난밤 별똥별도 주워서 닦고
하늘 숨은 낮별도 꺼내 닦는다
이 세상 별똥별을 한 손에 모아
어머니 아침마다 거울을 닦듯
구두 닦는 사람들 목숨 닦는다
묵숨 위에 내려앉은 먼지 닦는다
저녁별 가득 든 구두통 매고
겨울밤 골목길 걸어서 가면
사람들은 하나씩 별을 안고 돌아가고
발자국에 고이는 발바람 소리 따라
가랑잎 같은 손만 굴러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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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려면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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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않은 편지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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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을 꽃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
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진리에 굶주린 사내 하나
빈 소주병을 들고 서 있는 거리에도
종소리처럼 낙엽은 떨어지고
黃菊도 꽃을 떨고 뿌리를 내리나니
그동안 나를 이긴 것은 사랑이었다고
눈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물 깊은 밤 차가운 땅에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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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목소리
나무를 껴안고 가만히
귀 대어보면
나무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행주치마 입은 채로 어느 날
어스름이 짙게 깔린 골목까지 나와
호승아 밥 먹으러 오너라 하고 소리치던
그리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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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회
그대와 낙화암에 갔을 때
왜 그대 손을 잡고 떨어져 백마강이 되지 못했는지
그대와 만장굴에 갔을 때
왜 끝없이 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서귀포 앞바다에 닿지 못했는지
그대와 천마총에 갔을 때
왜 천마를 타고 가을 하늘 속을 훨훨 날아다니지 못했는지
그대와 운주사에 갔을 때
운주사에 결국 노을이 질 때
왜 나란히 와불 곁에 누워 있지 못했는지
와불 곁에 잠들어 별이 되지 못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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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
하늘에 무슨 슬픈 일이 저리 있어서
또 누구의 서러운 죽음 있어서
저리도 눈물마저 단단해져서
배추밭에 우박으로 쏟아지는가
나는 퍽퍽 구멍 뚫리는 배추잎이 되어
쏟아지는 우박마다 껴안고 나뒹군다
하늘에 계신 누님의 눈물 같아서
하늘에 계신 어머님의 눈물 같아서
온몸이 아프도록
온몸에 숭숭 구멍이 뚫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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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둔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그리움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안고 웃어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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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바람 부는 새벽
여기저기 코스모스 모가지가 꺾여져 있는 철로가
어린 개 한 마리가
철길에 똥을 누다가 문득 별을 바라본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별똥별처럼 기차는 사라지고
개들도 어머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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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인형
엄마는 겨울이 춥다고 한다
나는 엄마가 있어서 따뜻한데
엄마는 올겨울이 외롭다고 한다
나를 엄마가 있어서 외롭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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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에게 받은 짧은 편지
울지 마
엄마 돌아가신 지
언제인데
너처럼 많이 우는 애는
처음 봤다
해마다 가을날
밤이 깊으면
갈대잎 사이로 허옇게
보름달 뜨면
내가 대신 이렇게
울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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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아직까지도 가슴에 사무치는 말입니다....
사랑해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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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더기별
사람이 다니는 눈길 위로
누더기가 된 낙엽들이 걸어간다
낙엽이 다니는 눈길 위로
누더기가 된 사람들이 걸어간다
그 뒤를 쓸쓸히 개미 한 마리 따른다
그 뒤를 쓸쓸히 내가 따른다
누더기가 되고 나서 내 인생이 편안해졌다
누더기가 되고 나서 비로소 별이 보인다
개미들도 누더기별이 되는 데에는
평생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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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사람
그대 빈 들에
비 오는 사람
술도 집도 없이
배고픈 사람
사람들을 만나러 가기 위하여
떠나가는 사람들의
옷 적시는 사람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더니
빈집에 새벽부터
비 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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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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